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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충청감영 330년 역사를 돌아보며김정섭 (前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직대, 청와대 비서관)
김정섭  |  dingdong8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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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24  16: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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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섭.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국립공주박물관의 ‘충청감영’전이 5월 29일로 마감한다. 330년의 긴 역사에 비해 처음 마련된 “충청감영” 전시회는 무척 귀한 기회이다. 아직 보지 못한 분들에게 관람을 권한다.

공주의 역사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누구나 쉽게 “백제의 고도(옛 수도)”라고 답한다. 하지만 1603년부터 1932년까지 330년에 걸친 충청감영 소재지로서의 역사성 또한 작은 것이 아니다. 충청감영(1896년부터는 충청남도)의 정신적 물질적 유산은 지금까지 공주의 역사와 문화를 규정하고 있다. 백제문화가 땅 속에 있다면, 감영문화는 우리 몸 속에 있다. 우리 공주사람들이 가진 기질의 뿌리를 330년간 충청감영 주재지라는 데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선조는 왜 공주에 충청감영을 두었나

선조 34년인 1603년, 충청감영을 공주에 두도록 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참혹한 임진왜란을 겪자 국토 방어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공주는 북쪽으로는 차령산맥과 금강이 가로막고, 동으로는 계룡산, 남으로는 시가지 주변을 300m에 이르는 고지가 둘러싼 천연의 요새이다. 무엇보다도 수도 한양과 충청 내륙을 거쳐 호남지방을 잇는 육로의 중심길목이자 금강의 수로가 만나는 교통요지이다. 사실 이러한 점은 475년에 백제가 왕도로 택한 이유이다. 충청도의 딱 중심에 위치해 있어서 ‘구구십리(九九十里)’의 고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공주는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할 때까지 충청도의 수부로서 호서지역의 행정과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또한 많은 역사상의 사건을 겪었다. 임진왜란 때 조-명 연합군이 공산성에 주둔했고,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한양에서부터 파천해 머물었다. 황새바위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가 된 것도 충청감영에서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고, 동학농민군이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기어코 우금티를 넘으려 했던 것도 공주의 감영을 차지하면 척왜전쟁의 결정적 국면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충청도관찰사의 직무는 무엇이었나

조선조 들어 전국을 8도로 획정할 때 충청도는 54개의 고을로 구성되었다. 그중 공주는 정3품 목사가 파견된 4목(충주, 청주, 공주, 홍주)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다가 1603년부터 공주에 주재하는 충청도관찰사가 충청좌도 18관(충주, 청주, 청풍, 괴산, 옥천, 단양 등), 충청우도 36관(공주, 홍주, 면천, 한산, 천안, 서천, 임천, 대흥, 서산, 온양 등)을 관할하게 되었다.

관찰사(감사)가 집무하는 공주의 충청감영은 특히 ‘금영(錦營)’이라 했고, 충청관찰사는 ‘금백(錦伯)’이라고 불렸다. 금강의 비단 금자이다. 관찰사는 종2품직인데, 무관직인 병마절도사(종2품), 수군절도사(정3품)를 겸할 수 있었다. 관찰사의 주요업무는 광역 단위의 전반적인 정부기능을 총망라한다. 왕권을 대행하는 직무라서 그렇다. 각 군현의 수령을 관찰출척(觀察黜陟, 평가)하는 일이 기본업무이고, 감창(監倉, 재정의 감독), 안집(安集, 백성의 평안), 전수(轉輸, 조세의 수송), 권농(勸農, 농업의 장려), 관학(官學, 학문의 진흥), 형옥(刑獄), 병마(兵馬, 병사와 군마) 등이 그것이다. 공주에 부임한 충청도관찰사는 처음 금영이 설치된 1603년의 유근으로부터 1894년 박제순에 이르기까지 341명에 이른다. 관찰사는 평균 10개월 정도 근무했음을 알 수 있다.

충청감영은 공주시 어디에 있었을까

오늘날 공주시내에는 충청감영의 유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유적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다시 개축하고 개발해야만 했던 도시 사정 때문이다. 충청감영은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602년, 관찰사 유근이 공산성에 감영을 처음으로 설치했다.
1604년, 감영 건물을 시내의 제민천변으로 이전했다.
1624년, 이괄의 난으로 파천한 왕의 행재소를 공산성에 설치해 인조가 6일간 머물렀다.
1645년, 군사시설이 있어 방어가 용이한 공산성으로 감영을 이전했다.
1653년, 공산성의 교통이 불편해 제민천변으로 다시 이전했다.
1707년, 제민천변의 침수가 잦아서 봉황산 아래(현 사대부고)에 감영을 새로 짓고 이전했다.

이번에 국립공주박물관 ‘충청감영’전에 나온 전시물 중에는 이러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과 해설이 충분하다. 충청감영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충청감영과 공주’ ‘충청감영과 사람들’ ‘충청감영과 사건들’로 구분지었다.

보물 제561호 금영측우기가 100여년 만에 공주에 귀향했고, 감영에서 사용한 조선시대 목가구가 처음 전시된 것이 특기할 만하다. 공주 감영의 330년 역사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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