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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박동진 탄생 100주년을 기리며
김정섭  |  dingdong8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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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7.18  10: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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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섭.
박동진 명창을 기억하는 딱 하나만 들라면 우황청심원 광고다. “제비 몰러 나간다!”로 시작해 “우리의 것은 좋은 것이여!”라고 TV광고가 끝나면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선생은 1916년 음력 7월 12일,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 365번지(지금의 공주시 월송동 무릉통)에서 태어났다. 올해가 탄생 100주년이다. 그의 국악사에서의 업적이나 끈끈했던 고향사랑에 견주어 100주년을 기리고자 하는 관심이 더 집중되었으면 한다.

박동진은 타고난 천재인가? 후천적 노력파인가? 어려서부터 노래에 재주가 있기는 했으나 그를 소리꾼의 길로 이끈 것은 가난이었다. 그는 대전중학교를 다닐 때 일제 식민지 시기에 큰 인기를 끌었던 협률사의 공연을 보고 이화중선, 장판개 같은 명창들처럼 돼서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정산에 있는 첫 스승 집에서 새경 없는 머슴살이를 하며 1년 반 동안 소리 공부를 했다. 그후 유성장날, 공주갑부 김갑순이 튼 난장판에 올라가 ‘만고강산’ ‘춘하추동’ 같은 토막소리를 했는데 앵콜이 4, 5창이나 이어졌다.

박동진은 길거리 캐스팅되어 경북 김천, 대구, 경주의 권번(券番)에서 소리선생으로 일하게 되었다.
 
기생조합 겸 양성소였던 권번에서는 한시와 시조, 노래는 물론 악기와 춤, 그림까지 가르쳤다.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의 기예는 전통이 다 끊어지고 그런 식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박동진은 1933년 김창진에게서 ‘심청가’를 배운 것을 시작으로, 정정렬에게 ‘춘향가’, 유성준에게 ‘수궁가’, 조학진에게 ‘적벽가’, 박지홍에게 ‘흥보가’를 배움으로써 판소리 다섯 마당 공부를 완성했다.

그의 나이 20대 전반기였다. 조선성악연구회에 들어가 정정렬,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등 당대 최고수 명창들과 김소희, 박녹주, 박초월, 김연수 등 차세대 소리꾼들과 교유했다.

그는 생전에 “스승이 여덟이나 된다.”고 말할 정도로 여러 선생의 소리를 배워, 학습한 소리의 계보가 분명하지 않고 어느 바디도 완전한 전승이 되지 못한다는 말도 들었다. 불행일까 다행일까, 결과적으로 박동진의 판소리는 중고제로 시작해 동편제와 서편제를 모두 그의 한 몸에 넣은, 독특한 것이 되었다.

박동진은 1962년 국립국악원에 들어가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6년간 판소리 수련에 더욱 매달렸다. 마침내 1968년 9월 30일, 박동진은 새로운 역사를 쓴다.

판소리 「흥보가」를 다섯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른 것이다. 52세 때였다. 그때까지 완창을 할 수 있는 명창도 극히 적었고 무대에서 완창을 부르는 일도 없었다. 박동진의 「흥보가」 완창은 그 자체로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그는 일약 국악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로부터 박동진은 1969년 「춘향가」를 8시간 동안 날계란 두 개만 깨먹으면서 부르고, 「심청가」(1970년, 6시간), 「적벽가」(1971년, 7시간), 「수궁가」(1972년, 5시간) 등 판소리 다섯마당을 속속 완창했다. 하나하나가 혼신의 힘을 다한 대첩이었다. 박동진이 자신만의 출중한 기량과 익살맞은 너름새와 아니리로 완창을 거듭하자 잊혀져가던 판소리는 절찬을 받으면서 대중 공연예술로 되살아났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전통 판소리 열두 마당 중 실전된 판소리를 찾아내 사설을 보완하고 새로 곡을 붙여 발표했다. 「변강쇠타령」(1970), 「배비장타령」(1972), 「숙영낭자전」(1974), 「옹고집전」(1977) 등이 그것이다.

재주가 완성되고 이름이 나면 나태하기 쉬운데 박동진은 이를 경계했다. 팔순 나이에도 “하루 세 시간씩 소리를 내지르지 않으면 아랫배가 근지러워 못살겠다.”며, 타계하기 전날 아침에도 소리 연습을 했다고 한다.
 
스스로도 “내 머릿속에 판소리 18마당, 350시간 분량이 들어있다”고 말할 만큼 역사상 가장 레퍼터리가 다양한 소리꾼이었다. 실제로 공연장에서 청중들이 청하는 대로 막힘없이 불러주었는데, 늘 연습을 했던 박동진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즉흥적으로 판을 짤 수 있는 당대의 유일한 명창이었으며, 걸쭉한 재담, 노골적인 묘사, 현장에 맞춘 즉흥적 아니리를 가지고 관객을 몇 시간 동안 들었다 놨다 했다.

박동진 이전에도 공주 출신 명창들이 있었다. 김석창이라는 인물은 고종·순종 연간에 ‘춘향가’를 잘 불러 유명했다. 우렁찬 목소리가 장기여서 계룡산 산마루에서 지른 소리가 사방 30리에 들렸다는 황호통도 있다.

고종 앞에 불려가 소리를 하는데 호통치는 듯한 소리가 압권이라고 ‘호통’이라는 예명을 얻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적벽가’로 일세를 울린 박상도라는 명창도 공주출신이었다.

판소리는 박동진 선생이 세상을 떠난 2003년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흔히 동편제, 서편제 판소리밖에 없는 줄 알지만 충청도는 중고제 판소리의 못자리다. 또한 충청도관찰사가 주재하는 충청감영이 있었던 공주는 충청도에서 판소리가 가장 많이 불려질 수밖에 없었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주의 소리, 중고제 판소리를 들을 기회가 극히 드물다.

예향 공주의 맥을 이은 박동진 선생도 생전에 자신의 소리를 제일 잘 들어주는 곳이 어디냐 물으면, 고향 공주가 아닌 전주를 꼽았다고 한다. 박동진 탄생 100년을 맞아 개최되는 ‘박동진 추모 음악회’(7월 21일)와 제17회를 맞는 ‘박동진 판소리 명창·명고 대회’(7월 22,23일)가 새삼 소중하게 생각된다.
 
올해에는 기념 유물전시회도 함께 열린다고 한다.

박동진 선생의 생생한 실황영상도 볼 기회가 있으면 좋을 듯하다. 그의 호통이 귓전을 울린다. “제것도 제대로 못 찾아먹는 빌어먹을 놈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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